B.C 400년경에 그리스에서 옥외스포츠로서 시작되었던 당구는 영국기원설과 프랑스기원설이 있으며 처음에는 크리켓을 닮은 야외스포츠였던 것이 실내경기로 개량되어 유럽각지에서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인 당구게임의 시작은 크로켓 또는 바치(둘다 현대의 크리켓과 같은 형태)라는 옥외경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경기는 13세기경 유럽에서 아주 인기있는 오락이었고 이것이 14세기경에 현대의 당구 테이블의 형태로 되어 옥내형태로 끌어 들였다.
그 테이블은 쿠션과, 돌로 만든 베트가 있었으며 녹색의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이 것이 영국식 기원설이다.
또는 십자군 전쟁시 동방에서 유럽으로 가져 오게 되었고 스페인 등에서 고안 되었다는 스페인 기원설이 있으나 자료가 미미하다.
프랑스 기원설은 1571년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왕실의 예술가였던 드비니가 고안하고 간단한 규칙을 만들었다는데 기초를 둔다.
포켓 게임을 위주로 발전해 나갔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포켓을 이용하지 않는 전혀 다른 게임이 연구되어 퍼져 나갔는데, 바로 이것이 4구 및 3구와 같은 캐럼 게임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유럽에서는 같은 형식의 실내 경기로 발전해서 일정한 형태를 가진 틀이있는 테이블 위에서 공과공을 부딪쳐서 득점을 겨루는 게임으로 발달해 왔다.
영국에서는 상아 공을 2개 사용하여 당구대에 Ironarch(아이언 아치)라고 하는아치 모양의 관문을 세워서 이 아치를 빠져 나가게 하는 형식의 게임이었다.
18세기가 되자 테이블 위에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공을 떨어뜨려서 득점을 겨루는 형태로 개량되어 갔지만 이것은 아이언아치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초는 테이블 중앙에 구멍을 뚫거나 4구석에 구멍을 뚫었지만 테이블의 모양이 장방형으로 정해지고 나서는 테이블 4구석과 긴 쿠션의 중앙에 각 2개 총 6개의 구멍이 뚫리고 이 구멍에 공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포켓볼 게임의 원형이다.
1770년대에는 2개의 공으로 하고 있었던 기존의 방식에 붉은 제3의 공을 첨가해 3개의 공을 사용한 게임이 고안되었고, 수구를 다른 2개의 공에 맞혀서 득점을 겨루는 캐럼 게임으로 변천되었다.
19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영국의 '잭 카 (Jack Carr)'가 큐 끝에 백묵 가루를 칠하는 것을 생각해 냄으로서 큐 끝의 미끄러짐을 막고 공에 횡회전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공에 비틀림을 주는 것을 '잉글리시 (English)'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영국에서 고안된 타구법 이라는 데서 온 것이다.
그 후 프랑스의 '망고'가 팁의 원형인 가죽 조각을 큐 끝에 부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공의 회전력은 더욱 더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해, 밀어치기, 끌어치기, 비틈등의 놀라운 기술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에 당구가 전래된 기록은 조선조 고종 때인 1884년에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이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입국해 ‘헤리’라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투숙하여 당구대 위에서 잠을 잔 것이 1884년 9월 20일이었고, 일본 외무성이 발행한 <통상휘편> 제5책의 ‘1884년 11월 중 수입품 요략(일본산)' 옥돌대 1대가 수입된 사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것이 한국 당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1884년 기원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종전 한국 당구의 역사는 고 조동성 씨가 1980년 발행한 <내가 본 당구사>에서 “우리나라의 당구사는 1909년 황실에서 시작”이라고 서술한 내용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1909년을 기원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 당구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계속 발굴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 당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차원에서 필자는 지난 2014년 8월호 본지에 ‘한국 당구의 기원은 1884년, 일본에서 당구대가 수입되어 호텔 등 접객업소에 설치되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발표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1909년 황실 옥돌대’를 한국 당구의 기원으로 잘못 알고 있다. 당구가 제도권 스포츠로서 위상을 굳건히 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올해로 134년이 되는 한국 당구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당구는 결코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수난과 박해로 점철되던 시기도 있었다. 일본 강점기에는 일본인의 당구였을지언정 한국인의 당구는 아니었고, 광복 후와 6.25를 지나는 물질 빈곤의 시대에는 당구가 외면을 당했는가 하면, 80년대까지 정부로부터도 유기 종목으로 치부되어 서러움과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 선배 당구인들은 스포츠로서의 본질을 인정받고 회복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결과 마침내 오늘날 당당하게 제도권 스포츠로 입성할 수 있었다.
1989년 7월에 당구장이 체육시설로 법에 명시된 후 91년에는 한국 최초의 3쿠션 월드컵이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93년에는 헌법소원으로 ‘18세 미만자의 당구장 출입금지’가 해제되었으며,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당구가 종목으로 채택되는 것을 계기로 대한스포츠당구협회가 대한체육회에 인정종목으로 가맹이 승인되었다.
그 후 대한당구연맹으로 명칭을 바꾸어 준가맹을 거쳐 2005년에 정가맹이 이루어졌다. 또한, 2011년에는 마침내 당구가 전국체전 정식종목이 되면서 정식 스포츠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 빌리어즈(http://www.thebilliards.kr)